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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

위대한 도약

새시대 seaside 2020. 3. 2. 09:54

세상은 점이다

 

    그동안 '세상은 마이너스다'라고 말해왔지만 '세상은 점이다.'로 바꾼다. 이쪽이 머리 속에 그림을 그리기가 더 쉽다. 존재는 언제나 외력의 작용에 맞서 한 점이 되려고 하는 성질이 있다. 그 성질 때문에 물질이 형태를 획득하는 것이다. 조약돌이 둥근 이유는 점에 가까워지려는 성질 때문이다. 물방울이 둥근 이유도 같다. 

 

    자연의 고유한 비대칭성이다. 반대로 대칭성도 있다. 외부에 대해서는 일점이 되려고 하고 내부적으로는 50 대 50이 되려고 한다. 50 대 50이 되어야 그 일점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주는 대칭성과 비대칭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 외부에 대해서는 하나의 머리로 맞서고 내부적으로는 두 다리로 버틴다.

 

    그 하나의 머리가 외부의 다른 하나의 머리와 결합하여 더 큰 단위를 만드는 방식으로 우주는 망라되는 것이다. 외력의 작용에 맞서 자기를 보존하려는 성질이 하나의 점이 되려는 성질로 나타난다. 계가 외력의 작용을 견디지 못하면 깨져서 없어지고 견디면 점에 가까워진다. 밀도, 입체, 각, 선, 점은 그 과정에 도출된다. 

 

    반대로 외력을 흡수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아기는 보호받으므로 외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하다. 부모의 보호가 없는 데도 외력을 얻으려다가는 죽는다. 어리광이다. 국가의 보호를 받으려다가 약해진다. 동료의 동정심을 유발하려다가 약해진다. 언제나 아기에 머무르며 외부의 힘을 얻으려고 하는 자가 안철수다. 

 

    그는 자기의 방향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진보든 보수든 방향을 드러내는 순간 에너지 유입이 끊기기 때문이다. 안철수는 언제나 아기상태에 머무르며 성장하지 못한다. 많은 바보들이 외력에 압도되어 정신적 유아기에 머무르는 퇴행행동을 하며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 그러다가 사이비 종교나 음모론에 빠지는 것이다. 

 

    존재의 근본은 점이 되려고 하는 성질이며 그 반대로 가는 아기의 행동은 부모나 국가의 보호를 받는 특수상황이고 자연에서 그런 짓을 계속하면 죽는다.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외력에 맞서 자체의 동력을 가지고 형태를 얻어야 한다. 공자는 방향이 있고 노자는 방향이 없다. 노자의 무위를 계속하면 자연스럽게 죽는다.

 

자연에 차원은 없다.

 

    자연은 변하고 변화는 흔적을 남긴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점과 선과 면과 입체는 그 변화의 흔적들이다. 자연 그 자체에는 에너지의 출렁임이 있을 뿐 입체도 면도 선도 점도 없다. 에너지가 형태를 바꾸므로 그 변화를 추적하는 과정에 대칭성을 추적하는 질량보존의 법칙과 방향성을 추적하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성립하는 것이다. 

 

    변화는 한 점에서 끝나므로 인간이 찾으려는 것은 한 점이다. 그 점을 도출하는 과정에 입체와 면과 선이 추적된다. 실제로 자연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밀도에서 입체를 거쳐 각으로 선으로 점으로 차례차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변한다. 그 변화의 흔적이 외부에 반영될 때는 순서대로 나타난다. 어떤 변화든 바로 점까지 간다.

 

    화살을 쏘면 화살이 궁수의 손을 떠난 즉시 점은 도출된다. 점은 이탈지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궁수가 활을 쏘는 각도를 보고, 과녁까지 날아가는 선을 보고, 과녁에 가서 명중한 점을 확인한다. 궁수가 손가락을 떼는 점은 순식간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최초 에너지가 확산에서 수렴으로 방향을 틀 때 바로 입체 각, 선, 점이 도출된다.

 

    우리는 에너지의 작용측이 아닌 수용측을 관찰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필름이 아니라 스크린을 보고 판단한다. 그러나 실제로 영상이 있는 곳은 필름이다. 차원은 에너지의 작용측에 있으며 우리는 수용측을 관찰하므로 반대편을 보고 있다. 주먹을 휘두르는 권투선수의 근력의 밀도>상체의 입체>팔의 각>궤적의 선>타격의 점이다.

 

    우리는 반대로 사람이 들고 있는 상자를 본다. 사람이 입체이므로 상자도 입체가 된다. 사람의 근력에 에너지의 밀도가 걸려있으므로 상자에도 질량이라는 형태로 밀도가 걸려 있다. 에너지의 작용측을 보는 훈련을 해야 에너지가 확산에서 수렴으로 방향을 트는 즉시 입체가 되고 각과 선과 점은 이미 갖추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날아가는 공이 방향을 바꾸려면 방망이와 맞아야 한다. 타격이 일어나는 일점이 도출된다. 공의 궤적과 방망이의 궤적이 맞아 일점을 도출한다. 공과 방망이의 두 궤적이 만나 각을 이룬다. 공의 에너지와 방망이의 에너지가 수렴하여 입체를 이룬다. 우리는 길게 날아가는 공의 궤적에서 선을 발견하지만 그 선은 어디서 탄생했나?

 

    공과 방망이가 맞은 순간 도출된 선이 관성의 법칙에 의해 지속적으로 포착되는 것이며 그것은 야구장이 넓기 때문이고 좁은 공간이라면 순식간이다. 시계바늘은 점을 가리키지만 사실은 바늘과 숫자가 만나 이루는 선이 1초만에 사라진 것이다. 점은 의사결정의 지점이고 선은 연결선이며 각은 변화의 각이며 입체는 수렴의 입체다.

 

    밀도는 닫힌계의 밀도다. 모든 것은 계를 중심으로 한 에너지의 의사결정이다. 에너지가 두 방향을 가져 모순되면 변화를 일으켜 모순을 해소하는 과정에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성립되므로 그 작용의 흔적이 외부의 수용대상에 반영된 것이 입체와 면과 선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인간의 추상개념일 뿐 자연의 존재가 아니다.

 

대칭과 비대칭

 

    대칭과 비대칭은 동전의 양면이다. 대칭된 A와 B가 있으면 반드시 둘이 공유하는 토대 C가 있으며 에너지는 C에서 A와 B로 전달된다. 에너지 공급루트가 있다. 대칭된 A와 B 중에서 어디로 갈지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이때 A와 B는 대칭되므로 에너지는 A에서 B로 갈 수 있고 반대로 B에서 A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C로는 가지 않는다.

 

    만약 간다면 구분되어야 할 다른 사건이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에너지는 직류다. 몸통에서 에너지가 왼발이든 오른발이든 갈 수 있지만 언제나 몸통에서 손발로 갈 뿐 손발에서 몸통으로 가지 않는다. 손발에서 몸통으로 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다른 사건이다. 한 번의 걸음 안에서 에너지는 언제나 전체에서 부분의 일방향으로만 간다. 

 

    에너지는 하나의 몸통에서 대칭된 상체와 하체 두 입자로 갈린다. 그렇다면 몸통은 어디와 대칭되는가? 외부와 대칭된다. 그러나 비대칭이다. 사건의 닫힌계 때문이다. 외부는 에너지를 전달하고 빠진다. 즉 밖과 안의 대칭은 의사결정의 순간 닫힌계가 닫혀서 비대칭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부에서 상체와 하체는 대칭적으로 성립한다.

 

    같은 원리로 질에서 입자, 입자에서 힘, 힘에서 운동, 운동에서 량의 전개는 모두 비대칭이며 역방향으로 못 간다. 그러나 같은 층위에서 입자와 입자, 힘과 힘, 운동과 운동, 량과 량은 대칭적이다. 의사결정은 둘을 만들고 하나를 선택하는 형태로 일어나므로 일단 둘이 대칭되는 것이다. 하나의 국민이 여당과 야당의 대칭을 끌어낸다.

 

    두 개의 국민은 없다. 있다면 외국에 있다. 그러나 의사결정은 국내에서 국경으로 닫힌계를 이루므로 외국은 배제한다. 물론 더 큰 단위의 인류로 본다면 국가와 국가의 대칭이 있다. 두 개의 국민이 있다. 이는 인류단위의 사건이고 국가단위 사건은 국경 안으로 닫힌계가 좁혀진다. 국민에 대칭된 무엇은 없다. 국민이 절대갑인 것이다.

 

위대한 도약

  
    우리는 관측된 정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정보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피부로 지각된다. 그 정보는 관측대상을 거쳐온 간접적인 정보다. 과수원에서 붉은 사과를 하나 봤다면 그 정보는 태양의 빛이 사과를 거쳐온 것이다. 우리가 본 것은 상당부분 피사체인 사과의 사정이 아니라 광원인 태양의 사정이다. 그러므로 조명의 밝기에 따라 사과의 색깔이 다르게 보인다. 

 

    에너지의 작용과 수용이 있다. 보이는대로 반응한다면 에너지의 수용측에 선 것이다. 작용측에 서야 진실이 보인다. 사과를 거쳐온 빛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것이 아니라 사과 안에서 어떤 의사결정이 일어나는지를 능동적으로 봐야 한다. 피사체를 거쳐온 간접 정보 말고 관측대상 그 자체의 내부사정을 직접 읽어내는 방법이 구조론이다. 내부에는 의사결정구조가 있다.

 

    사과가 내부에서 빛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내부에 있는 것은 어떤 둘의 간격이다. 우리는 막연히 대상 그 자체의 고유한 속성이 있다고 믿지만 이는 어법에 맞지 않은 잘못된 언어사용이다. 고유하다는 말은 모르겠다는 말과 같다. 내부에 어떤 둘이 만나는 간격이 있어서 정보를 연출하면 인간은 그 정보를 읽는다. 그 내부의 간격이 구조다. 진실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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